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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스타트업의 브랜드북 작업을 하게 됐다. 몇 달의 시간이 지난 후 흐뭇한 결과물을 받을 수 있었다. 책이 입고되던 날, 회사 대표님이 너무 좋아한다는 피드백에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담당자로부터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누군가 옥의 티 같은 오탈자들을 꼼꼼히 찾아 그 리스트를 보낸 모양이었다. 명백한 내 잘못이었다. 나는 곧바로 이전 책을 폐기하고 새로 책을 찍자고 했다. 1000부를 새로 찍는데 44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나는 이 비용을 모두 대겠다고 했다. 회사 대표로부터 연락을 받은건 그 다음날의 일이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제안을 받았다. 전량 폐기하고 재쇄본의 비용을 내가 감당하는 것, 또 하나는 기존 책을 활용하는 조건으로 폐기하지 않는 대신 재쇄본의 비용을 절반씩 대면 어떻겠냐는 의견이었다. 선택은 내게 맡긴다고 했다. 하루 종일 고민하다가 결국 두 번째 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재정적인 부담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도 이런 결정에 후회는 없다. 나는 내 작업물의 콸러티를 지키기 위한 혹독한 수업을 했다. 수업료로 생각하면 아까울 일도 없다.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마음 깊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요즘 사회 전반에 흐르는 기류는 '돈'이다. 모두가 월 천에 열광한다. 모두가 쉽게 돈 벌 수 있다고, 생각만 바꾸면 당신도 쉽게 일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고 온갖 유혹을 해온다. 함께 책을 쓰는 어느 대표님은 사람 뽑기 힘들다고 깊은 한숨을 쉬며 하소연을 해왔다. 신입 직원들도 당당하게 투잡을 요구한다고 한다. 실제 일하는 직원 중에도 회사 일 외에 다른 일을 하는 직원이 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다. 정직하게 일해서 언제 월 천을 벌겠는가. 한 달 천만 원의 수입은 우리나라 상위 5%가 벌어들이는 수입이다. 그나마 연봉 1억이라 해도 실수령액은 700만 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옆에서 너도나도 하루 1시간 일하고 천만 원을 번다고 광고해대니 동요가 없는게 이상하다. 꾸준히 성실하게 일하는 게 바보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나는 스몰 스텝이라는 책을 썼다. 꾸준히 매일 조금씩 나에게 힘이 되는 실천들을 반복하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자기다운 삶, 나아가 스스로를 브랜딩하는 방법에 대한 나의 아이디어를 담고 싶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지금과 같은 '빅 스텝'의 시대에 조금은 미련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한 가지 일을 꾸준하게, 묵묵히, 성실하게 해내는 것. 진짜 브랜드는 이렇게 우직하게 태어나는 법이다. 마치 수없이 많은 담금질을 견뎌낸 칼이 쉽게 부러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성실함을 비웃듯이 한 번에, 쉽게, 일하지 않고 돈 버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넘쳐난다. 꼰대 같은 소린 줄 안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처럼 성공에도 쉬운 지름길은 없다. 그건 진리다.

 

비즈니스는 한 마디로 무거운 약속이다. 우리는 줄 수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 약속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돈을 받는다. 그 약속의 무게가 곧 삶의 무게다. 20년 넘게 직장 생활, 사회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브랜딩이란 세상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약속을 지키고 신뢰를 쌓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 일' 하면 떠오르는 브랜드가 되어 간다. 하지만 그 과정은 어렵고 힘들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러니 아무리 인생이 힘들다고 해도 너무 쉽게 돈을 벌고 성공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의심하자. 그 사람의 성공을 카피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헛된 약속을 버리자. 당신의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오랜 기간을 두고 찾아보자. 그것을 원하는 세상의 필요를 기다리자. 끊임없이 그 과정을 반복하자. 그러면 언젠가 당신도 누군가 흠모하는 브랜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s. 왜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드물까? 이 시대에 어른이 없다는 걸 절감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