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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브랜드

여기 두 개의 세상이 있다

비버 박요철 2023. 1. 31. 02:30

여기 두 개의 세상이 있다. 그 중 한 곳은 '돈'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돈이 된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결국 옳은 사람이 된다. 선이 된다.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떻게 하면 자동으로 통장에 돈이 꽂히는 시스템을 만들지를 끝없이 고민한다. 그래서 이들은 언제나 치열하다. 그들이 가진 지식, 인맥, 노력을 총동원해서 돈을 벌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노동하지 않고도 돈을 벌려면 또한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돈이 된다. 이들에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다. 조금은 부도덕해보여도, 양심을 속여서라도,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더라도, 때로는 법망을 피해서라도 돈을 벌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세상이다.

또 다른 한 곳은 '가치'가 중심이 되는 세상이다. 이들은 자신의 제품과 서비스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에게 돈은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애써 돈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가치란 세상의 필요, 문제, 결핍, 욕망 등이다. 그들은 좋은 제품에 이 가치를 더하는 과정을 통해 부와 성공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하면 정직하게, 투명하게 일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때로는 앞뒤 꽉 막힌 고집을 피우기도 한다. 그들은 다분히 이상적으로 보인다. 그들은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철학자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들의 제품은 메시지와 스토리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범접할 수 없는 명성을 얻고 때로는 전설이 된다. 그러나 그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아주 아주 소수일 뿐이다.

내 나이 서른 다섯일 때 처음으로 '브랜드'를 접했다. 그곳은 신세계였다. 그들은 청바지를 팔지 않았다. 리바이스를 팔았다. 그들은 반지 대신 티파니를 팔고, 물 대신 에비앙을 파는 세상이었다. 애플의 아이폰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건 물건이 아니라 시대가 낳은 하나의 유산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가 뿜어내는 아우라에 사로잡혀 행복해했다. 브랜드를 배우고, 그에 관한 글을 쓰는 과정은 엄청난 수련을 요구했다. 눈의 실핏줄이 터지고, 우울증에 빠지고, 결국엔 공황장애와 발작으로 병원 신세를 질 때까지 무려 7년의 시간을 견뎌내며 브랜드란 것을 배웠다. 문제는 그렇게 배운 지식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 그때였다. 내가 배운 이 지식은 그다지 큰 쓸모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몇 달 동안 브랜드 컨설팅을 받던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젊은 대표가 앞뒤 없이 이렇게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지방에서 시작해 서울에 여러 개의 매장을 둔 이 브랜드의 햄버거는 그 맛을 만들어가는 가정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집요했다. 그들은 햄버거의 완성도를 생각해 단 하나의 메뉴만을 만들고 있었다. 햄버거의 재료에 관한 한 그들의 집요함은 혀를 내두르게 했다. 양상추의 아삭함을 지키기 위해 포장하는 단위를 고민하고, 가장 맛있는 감자를 구하기 위해 전세계를 돌았으며, 패티의 두께는 물론이고 소금의 크기까지 고민했다. 나는 그런 그들의 진정성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브랜딩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카피를 쓰고, 스토리를 정리하고,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몇 달이 지나자 이 브랜드는 당시 한창 핫하던 도넛 브랜드에 그들의 마케팅을 통째로 맡겼다. 그날의 그 짧은 통보를 뒤로 하고 돌아오면서, 나는 심각하게 나의 직업을, 미래를 고민했다.

그리고 6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브랜드 컨설팅이란 다소 모호한 성격의 직업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때로는 즐기고 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것 만큼이나 하나의 브랜드를 고민하고 연구하고 컨설팅하는 일이 즐겁다. 나는 여러 회사 제품과 서비스의 네이밍을 했다. 그들 대부분이 만족해했다. 그들의 브랜드 스토리를 정리해 책을 만들기도 했다. 역시 많은 칭찬을 받았다. 강의를 하고, 워크샵을 진행하고 SNS에 글을 올리고 브랜드 관련 책을 썼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핫한 브랜드의 등장과 소멸을 바라보면서 이른바 '성공의 방정식'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돈과 인기와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쉽게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를 고민하게 했다. 그들은 돈을 버는 쉬운 방법이 있다고 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그들을 향해 몰려갔다. 마치 사막 속 화려한 사막 속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내가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돈이 아닌 가치만을 추구하는 위선자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회의와 의문을 가질 때가 더 많았다. 무려 2년 간 전혀 수익이 나지 않은 사업을 계획하느라 전력을 다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회사의 리더가 '수익'보다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회사를 뛰쳐나왔다. 나는 편의점 알바를 해서라도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절박한 위치에 있었다. 그때 내게 구원의 손길을 뻗은 어느 화장품 회사의 대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앞서 말한 두 개의 세상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에서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돈과 가치, 어느 하나도 얻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얻은 사람들은 상위 1%의 천재들이거나 운이 좋거나 타고난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운이 좋게도 나는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돈을 버는 사람들을 함께 만났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들 자신의 기대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스마트 스토어를 운영하는 어느 회사는 중국산 칫솔을 수입해 팔면서 서울의 알짜배기 땅에 집을 샀다. 그 회사의 대표는 적지 않은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며 '브랜딩'을 배워갔다. 그런 과정을 몇 번 겪으며 나는 겨우 나의 직업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은 여전하다. 그 사이 세상은 바뀌고 있다. 시장의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져 간다. 돈을 가진 사람들이 더 큰 돈을 번다. 그들이 쌓고 있는 그들만의 리그는 점점 더 공고해지고 있다. 마케팅의 많은 부분들이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에 놓여 있다. 과연 MZ세대들이 열광하는 '가치 소비'란 실체가 있는 것일까. 그들 역시 그저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을 쫓는 불나방 같은 소비자들은 아닐까.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들이 있다. 수없이 많은 애벌레들은 구름에 가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탑의 꼭대기를 향해 맹렬히 올라간다. 그런데 그 중 몇몇의 애벌레들은 의문을 품는다. 과연 저 끝에 뭐가 있는 것이지? 그리고 애벌레들의 탑을 내려와 스스로 고치를 만든다. 그리고 나비가 되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 탑의 꼭대기를 날아다닌다. 애벌레들은 그제서야 그 맹렬한 상승의 행력을 멈추고 자신만의 고치를 만들어 나비가 된다. 하지만 이건 동화다. 내가 이 시장의 공식에 의문을 품은 애벌레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고민의 끝이 해피엔딩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이 시대의 마케팅, 브랜딩에 의문을 질문을 던지고 싶다. 무엇이 옳은 마케팅인가, 브랜딩에 정석은 있는가. 그 답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현장의 증언은 들을 수 있다. 내가 앞으로 쓰고자 하는 이야기는 거대한 욕망의 탑을 빠져나와 마케팅과 브랜딩의 끝에 있는 진실을 찾아가는 애벌레의 여정이다. 내가 가진 무기는 오직 하나, 바로 시장과 사람과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