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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After

오래 된 설탕의 맛, 카페 라떼

비버 박요철 2019. 1. 6. 04:29

나는 독서실 알바였다.

매일 아침 10시, 집에서 5분의 거리를 걸어

독서실 문을 따고 하루를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루틴이 생겨났다.

아침은 어쨌든 커피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그 취미가 고급스럽진 않았다.

그때 나는 갓 제대한 복학생이었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쓰고 수능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격은 언제나 젬병이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열망을 가진

갓 제대한 싱싱한? 젊은이였다.

남은 시간은 5개월,

군입대의 꿈보다 두려운 '수능 다시보기'를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의지로 다시 결심한 때였다.

그래서 필요한 건 한 줌의 카페인

나는 독서실 문을 열 때마다

캔커피 하나를 의식처럼 마시곤 했다.

'덜커덩'하고 커피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는

그런 나의 의지를 다시 불러 깨우는 듯 했다.

맥심도 레쓰비도 아닌 '네스카페'...

절반은 설탕의 맛일 그 커피가

그때의 외롭고 힘든 결정에 동반다가 되어 주었다.

새벽 2시 반, 혹은 3시 반

일이 있을 때마다 새벽을 깨우는 요즘도

그 첫 시작은 커피와 함께 한다.

요즘 마시는 커피는 '카페라떼'...

언젠가 직장 동료가 권해준 커피였다.

스틱 커피에 들어간 프림 때문에 항상 속이 불편했는데

카페라떼는 우유가 들어가서 괜찮다고 했다.

그때 900원 하던 카페라떼가

지금의 1600원으로 오를 때까지

포장은 서너 번 바뀌었고

용량은 크게 한 번 늘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와이프는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나를 위해 6개들이 포장을 사오곤 했다.

단가가 1000원이 채 안될만큼 저렴해지니까.

커피 마니아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함께 일했던 동료 하나가 특히 그랬다.

중년의 남자가 빨대를 빠는 모습

과히 아름답지 않다고 대놓고 핀잔을 주었다.

그래서 나도 노력을 했다.

함께 일하는 2년 내내 원두 커피를 내려 마셨다.

그것도 원두를 직접 갈아 내리는 핸드드립으로.

예가체프와 케냐AA를 비롯한 다양한 원두를 섭렵했다.

그런데도 카페라떼 중독은 치유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커피맛을 모른다.

아메리카노는 언제나 남긴다.

라떼의 밍밍함을 감수하느라 진을 뺀다.

그 비밀이야 설탕에 있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그래도 나는 그 달달함이 좋다.

커피에 설탕을 탄 것인지,

설탕물에 커피 가루를 탄 것인지

백종원의 레시피처럼 친숙한 그 맛에

중년의 품위 따위는 눈을 꼭 감고 무시해버린다.

가히 그 모양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다름 아닌 그때의 그 기억 때문이다.

그때의 외로운 결정의 지지자였기 때문이다.

2년을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다시 수능을 준비하고 있었을때

나의 유일한 동반자이가 지지자는 네스카페 캔 커피였다.

'덜컹'하며 내려오는 커피가 가장 반가웠다.

나는 그때 커피를 샀던 것이 아니다.

외로움을 달래줄 한 모금의 설탕을 샀던 것이다.

커피는 농구의 왼손처럼 거들었을뿐,

그래서 이후로도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캔커피를 마셨다.

마음이 공허할 때면 카페라떼를 마셨다.

심심하고 외로우면 플라스틱 빨대를 꽂았다.

여운이 남도록 오래도록 물고 있었다.

누군가는 커피를 맛으로 마실 때

나는 어쩌면 시간의 기억을 마셨다.

명절 때 기차를 타면 두 가지를 사곤 했다.

씨네21 한권과 카페 라떼...

그 두 가지를 손에 쥐면 명절 같았다.

약간의 들뜸과 조금의 달달함...

그 기분이 어디서 왔는지는 언제나 선명했다.

나는 두 번째 수능을 꽤나 잘 보았고

그토록 원하던 두 번째 대학 생활을 꽤 즐겁게 끝냈으니까.

그래서 나는 커피를 맛으로 마시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즐거움으로 마신다.

누구에겐 그게 소울 푸드일 테고

다른 누구에겐 그게 맛집 리스트겠지?

이렇게 값싼 커피 한 잔에도 스토리는 있다.

이 글을 쓰는 시간 3시 54분,

일요일의 아침에 불현듯 오랜 기억을 소환한다.

그 동반자는 역시나 카페라떼 한 잔이다.

기억을 끄집어 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빨간색 앙증맞은 스트로우를 떼낸 후

투명 두껑의 틈을 찾아 꽂은 후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시면 모든 준비는 끝난다.

이제 마음의 소리를 담아 키보드를 두드린다.

그렇게 나를 향한 한 편의 사담이 완성되곤 한다.

덜커덩...

기억 속 독서실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가 소환된다.

덜커덩...

추억 속 명절 기차가 고향을 향해 출발한다.

덜커덩...

하루를 시작할 엔진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나만의 리추얼이 또 다른 삶을 소환한다.

혹 당신에게도 그런 루틴이 있는가.

한 모금의 달달함으로 하루의 피곤함을 달랠 마법이.

나는 오늘도 그렇게 카페라떼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