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첫째가 재수 끝에 호원대 실용음악학과 후보 1순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알고보니 이 쪽에선 이른바 서동호로 불리는 탑티어에 속하는 학교더군요. 제가 좋아하는 슈퍼스타 K 출신의 장재인 등이 졸업생입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누군가와 톡으로 대화를 하다가 울컥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래도 아빠라고 마음 고생을 조금은 했던 것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또 마음대로 할 수 없는게 자식들이 아닐까 싶어요. 나의 잘난 점보다는 못난 점을 물려준 것 같아 마음 아플 때도 많습니다. 첫째가 등교 거부를 하던 뜻밖의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누가 봐도 루저로 낙인 찍힐 듯 허름한 대안학교(학교에 죄송합니다)를 지나 계원예고에 입하하던 그날, 그리고 다시 6개월 만에 학교를 뛰쳐나온 아들을 어떻게 대할지 난감해하던 그 순간이 떠오릅니다. 한 가지 다행인건 아들에겐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얘기를 들어주는 엄마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저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아들은 오후 2, 3시가에 되어 겨우 일어나 세상 무기력한 모습으로 밥을 먹습니다. 학원을 갑니다. 그리고 연습실을 빌려 밤 11시까지 있다가 또 다시 무기력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옵니다. 또다시 밤새 무언가를 하다가 새벽 4,5시가 되어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학원비와 연습실 대여비만 100만 원 정도가 들어갑니다. 아빠로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생활 습관입니다. 다른 아이들과 굳이 비교를 하진 않았습니다. 저는 아이의 행복을 원합니다. 하지만 '저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진 않았습니다. 이제서야 소설가 김영하 씨의 아버지가 다 큰 아들이 밤새 글을 쓰다가 남긴 재털이를 비웠다던 그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매일 그렇게 아들을 향한 불만과 의심과 체념의 재털이를 비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는 다시 아이에게 그 우울감을 물려주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예술가적 기질을 물려준 것이지요. 닥달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려주었습니다.

자퇴를 포함해 이제껏 세 번의 입시를 치루었습니다. 단 한 번도 합격 가까이 가본 적이 없습니다. 첫째는 유달리 무리력한 아이입니다. 입시를 치러 가면서 수험표나 신분증을 집에 두고 가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올해 서울예대는 시험을 치르지도 못했습니다. 수험 등록 날짜를 까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모라지만 울화통이 터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삼수까지 각오했지만 이 사실을 아는 친구들의 걱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낙오자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겁이 났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후보 1순위 합격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나름 동아방송대를 아깝게 떨어진 아들은 호원대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가능성 있는 소식을 접하니 온 가족이 달 뜬 기분으로 그 날 저녁을 보냈습니다. 저도 모르게 두둑한 용돈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저녁 아들과 엄마는 또 새벽까지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원하던 학교가 아니었던게 문제였습니다. 결론은 학원 입시 담당 선생님과 논의 후 결정하자였습니다.

다시 다음 날이 밝았습니다. 면담을 다녀온 아이 엄마는 한껏 들뜬 표정이었습니다. 예상과 다른 학원의 제안 때문이었습니다. 호원대 입학을 독려할 것이라는 에상과 달리 원장님까지 가세한 학원은 한 해 더 기회를 달라고 합니다. 째즈 쪽은 거의 교수 수준의 실력을 갖췄다고 하네요. 그럴만도 합니다. 그쪽은 자기가 알아서 뉴욕의 뮤지션에게 줌으로 개인 지도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발라드와 같은 대중 음악 쪽은 그렇게 약하다고 합니다. 그것도 당연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아니면 잘 안하는 아이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쪽은 조금만 더 연습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사비를 털어서까지 첫째를 가르쳤던 학원의 입장은 다음 해를 노려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일찌감치 아이가 원하는 쪽으로 가자고 말해둔 상태였습니다. 졸지에 학원에서 쿨한 아버지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한 번 더 아이를 믿어보려고 합니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건 누구나 두려운 법입니다. 하지만 남들 가는 길을 생각없이 따라가는건 더 싫습니다. 저도 2,30대의 시간을 한없이 무기력하게 보냈습니다. 학교며, 회사며 당연히 가야 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울면서 다녔습니다. 그리고 40대가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굳이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6년 째 홀로 일하고 있습니다. 우려와 달리 먹고 살고 있습니다. 수입은 몇 배로 늘었습니다. 최근엔 세바시와 1년 24번의 브랜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작은 브랜드의 연합체인 스브연, 즉 스몰 브랜드를 위한 연대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100여 명 가까운 분들이 함께해주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들을 지금 혼자 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롭지 않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연대로 많은 일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로 소속은 되어 있지 않아도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나고 또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건 누가 봐도 대단한 분들이 굳이 저를 찾아오고 계시다는 겁니다.

저는 첫째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기타를 전공하고 있지만 굳이 기타리스트가 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음악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친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한 후엔 무어라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집 안엔 예술을 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음주가무?를 즐겼던 아버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유전자가 혹 있었다손 치더라도 먹고 살기 위해 포기했었을 겁니다. 세상 예뻤다던 고모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가족의 기억 속에서 강제로 지워졌습니다. 큰 아버지는 평생 방랑의 삶을 살았다죠. 그게 다 예술가적 기질의 한 단면을,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작은 시대의 비극으로 기억해도 되지 않을까요. 저는 그 유전자를 내리받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방법대로 삶을 꾸려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부모인 제가 할 일은 그저 낙오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어 뒤를 받혀주는 것 뿐입니다.

학교 밖 아이들이 서울에만 수만 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또 각자의 사연을 가진채 그들만의 삶을 살아내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모든 부모들이 다 저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을 거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1,2등급이 아니면 아무 의미없다는 대학을 왜 그렇게 다들 가야만 할까요. 물론 좋은 대학을 나오면 인생의 출발점이 달라지는 건 사실입니다. 만나는 사람, 주어진 기회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개성과 기질을 싸그리 무시한채 갈아넣든 입시에 매달리는건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나름의 결을 가지고 태어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 아이는 어쩌면 혼자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아이일지도 모릅니다. 입시보다는 예술에, 스포츠에, 관계 맺기에 더 많은 재능을 갖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아이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돌봐야할 존잰들인지도 모릅니다.

면담을 마친 첫째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 길로 바로 연습실로 갔다고 합니다. 솔직히 저는 돈을 많이 벌어 아이를 미국이나 영국으로 보내고 싶습니다. 최소한 우리나라보다는 예술가의 삶을 더 존중해줄 거란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표는 단 한 가지입니다. 아이의 행복입니다. 비록 그 길을 제가 미리 가본 것은 아니지만, 어쩌겠습니까. 우리는 어차피 세상에 단독자로 불려진 존재인 걸요. 내가 행복해야 비로소 그 다음에 주변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똑같은 출발선에서 내달리는 경주가 아닙니다. 그저 각자의 방향으로, 각자의 속도대로 갈 수 있는 만큼 사방으로 내달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의 삼수를 지지합니다. 그때도 떨어진다면 그때 가서 다시 머리를 맞대보겠습니다. 우리의 진짜 목적은 대학 합격이 아니라 첫째 아이 서원이의 행복, 오직 그 하나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