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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퇴근길 지하철을 빠져나와 마을 버스를 기다렸다. 무려 10년이 넘게 무한 반복해온, 그래서 어린 시절 배운 자전거 타기 처럼 익숙한 동작으로 긴 줄의 끝에 섰다. 아직 버스는 도착하지 않았고, 나는 괜한 조바심으로 버스가 오는 쪽의 자동차 불빛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노트북이 든 가방은 아침보다 두 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해결하지 못한 회사 일들로 마음은 더 무거웠다. 조금이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씻고 먹고 자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문득 이런 일상이 지겹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내일도 똑같은 하루가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이 숨막히게 밀려들었다.


그 순간 나는 버스를 기다리는 긴 줄을 벗어나 평소엔 한 번도 다닌 적이 없는 개천의 산책로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분당을 가로지르는 탄천을 따라 잘 정비된 인도와 자전거 길이 곧게 뻗어 있었다. 그 많은 사람과 자동차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대신 녹색의 보도와 갈색의 자전거 길을 따라 난 억새와 풀숲이 나를 반겼다. 나는 천천히 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향하는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유유히 맑게 흐르는 개천의 물을 감상하면서, 그 물 위를 노니는 오리와 잉어들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버스가 아닌 두 발로 걸어 퇴근을 했다. 집까지 가는 데는 약 30분이 걸렸다. 마을버스로는 20분쯤 걸리던 길이었다. 그토록 오래 걸었는데 겨우 10분이 더 걸렸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런 사소한 결정 하나가 내 삶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지를.





그리고 약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날도 두 번의 미팅과 한 번의 강의로 지친 몸을 끌고 지하철 역사를 나왔다. 비가 오는 밤이었다. 쉬고 싶은 마음을  굴뚝 같았지만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하도 많이 걸어 익숙한 녹색의 보도를 따라 걸었다. 습관처럼 아이폰의 이어팟을 꺼내 귀에 꽂고 팟캐스트를 열었다. 책, 시사, 드라마, 역사, 상식, 브랜드... 마치 식당의 메뉴 고르듯 한참을 고민하다 '드라마'를 꺼내 들었다. 작가와 PD들이 나와 평소에 즐겨 보는 드라마에 관한 수다를 떠는 팟캐스트였다. 그날의 주제는 '인생에 단 한 편만 볼 수 있다면... 왕좌의 게임' 특집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성공한 삶, 행복한 일상을 좇아왔다. 그래서 일 년에 수백 권의 책을 읽기도 했고, 나름대로 직업을 바꾸는 무모한 도전을 하기도 했다. 주말과 새벽을 가리지 않고 일해보기도 했고, 결국은 지쳐 쓰러져 (공황장애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 삶을 바꾸는 방법은 단 하나라고 생각했다. 더 많이 고민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루저가 될 것 같아서였다. 나 뿐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다. 10년 간 고민없이 출퇴근을 반복했던 마을버스도 마찬가지였다. 걸어서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다른 퇴근길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동료 한 사람이 무심코 자신은 걸어서 퇴근한다고 했다. 아, 그랬지. 걸어서 가는 방법도 있었지. 하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버스보다 몇 배는 더 걸릴 퇴근을 감행하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고작 900원인 마을버스비를 아끼려고 그 길을 걸어간다고? 차라리 그 시간에 빨리 씻고 쉬는게 남는 장사가 아닐까? 하지만 단 한 순간 용기를 냈고 다른 길을 걸어 퇴근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걸어서 가는 그 조용한 퇴근길이 내게 회복과 힐링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에 산책과 러닝과 자전거 라이딩으로 활기차고 건강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각양각색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숨어있던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런 시간을 통해 다시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만일 내가 그 날의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처진 어깨로 퇴근길의 마을버스를 힘없이 오르고 있을 터였다.


왜 지난 10년 간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까? 109번 마을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방법 말고도 수없이 다양한 퇴근길의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만일 퇴근길 하나도 이렇게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면, 내 삶의 다른 영역에도 이런 변화를 줄 수 있는 사소하고도 손쉬운 방법들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일단 걷기로 했다. 때로는 음악을 듣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걷기로 했다. 피로가 풀리고 생각이 맑아지고 혈압이 떨어지는 것은 부수적인 효과였다. 파김치가 되고 초주검이 되었을 저녁 시간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남다르게 해볼 용기가 생겨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원칙도 있었다. 1년 이상 매일 반복할 수 있도록 아주 간단하고 사소한 도전일 것, 하고 나면 뿌듯한 기분이 밀려드는 좋아하는 일일 것, 밀린 숙제하는 부담이 되는 순간 그만 둘 것... 그렇게 내 삶의 변화를 위한 '스몰스텝'이 시작된 건 바로 그 날부터였다. 그날의 우연하고도 즉흥적인, 퇴근길의 낯선 산책이 시작된 그 날 이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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